2014년 5월 28일 수요일

【storyis 고전괴담】요신(妖神) 팔령(八鈴)

팔령신(八鈴神) 영신각(鈴神閣)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개요》
고려말의 기록과 경상북도 영덕군의 구전 설화에서 전해지는 요괴(妖怪) 혹은 신령(神靈)이다.

언제부터 숭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말렵에 영해도호부(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서 모셔졌던 기록이 있다. 고려사 등에는 영해면에 신당이 있었으나 영해에 부임한 영해사록 우탁에게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전히 신당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대까지도 영신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파괴된 뒤에도 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지역 주민들은 장소만 옮겨서 계속 모신 것으로 보인다.

영덕군 현지에는 구전 설화가 남아 있다.

《특징》
기록에는 이름만 나타나고, 자세한 묘사가 없다. 특징은 주로 민간의 구전 전승에서 알 수 있다.

팔령은 형체가 보이는 존재는 아니며, ‘허공에 들리는 방울소리’로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 방울 소리가 나면 사람이 병이 들거나 동네에 흉년이 들거나 하는 재앙을 일으킨다. 제사를 지내면 해를 끼치지 않는다.

사악한 요괴인 것만은 아니며, 서낭신으로 마을을 지키거나, 역신(疫神, 돌림병의 신) 같은 다른 잡귀신을 막아내는 수호신으로서도 활동하는 긍정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다.

구전에서는 본래 여덟 신이라고 하지만, 우탁에게 퇴치되어 동해 바다에 빠뜨려버렸으며 구전에 따라 다르지만 1~3체 정도의 신령만 남았다고 한다.

영해지방에는 팔령신소재백귀퇴치(八鈴神所在百鬼退治)라는 문구를 적은 부적을 쓰는 풍습이 있다.


《문헌기록》
문헌 기록은 비교적 단순하여, 고려사에 기록된 우탁 열전에서 영해 사록으로 부임했을 때 팔령의 사당을 파괴했다고 언급되어 있는 정도이다. 다른 문헌의 기록은 대개 우탁 열전의 기록을 인용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팔령신이 영해의 성황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우탁 열전》
禹倬, 丹山人, 父天珪鄕貢進士.
우탁은 단산(=단양丹陽) 사람이다. 아버지 천규는 향공(鄕貢, 지방 1차 과거) 진사(進士)이다.

倬登科, 初調寧海司錄, 郡有妖神祠名八鈴, 民惑靈怪, 奉祀甚瀆.
탁이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는데, 고을(郡)에 팔령(八鈴)이라는 요신(妖神)의 사당(祠)이 있었으며, 백성들이 괴이한 영(靈怪)에 홀려서, 제사를 바쳤는데 매우 더러웠다.

倬至卽碎之, 沉于海, 淫祀遂絶.
탁이 이에 즉시 부수고, 바다에 던져버리니, 음사(淫祀)가 마침내 없어졌다.

倬通經史, 尤深於易學, 卜筮無不中.
탁은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고, 또한 역학(易學)에 정통해서 점을 치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5권, 《동현사략》,《동사강목》 등이 열전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우탁에 대해서는 역에 능하여 역동(易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하며, 팔령신퇴치설화 이외에도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 개구리를 멸종시키겠다고 선언하자 개구리들이 몰려와서 빌었다거나, 백호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던 것을 경(敬)자를 써서 막아냈다고도 전해진다.(링크)

우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유교넷을 참조.(링크)

) 사록(司錄) : 고려시대의 정7품 관직이다. 목(牧)·도호부(都護府)·유수관(留守官) 등에 파견되었다. 수령을 보좌하는 위치지만 임무가 광범위하여 반란진압·도적체포·호랑이사냥 등 군사임무, 사역, 향리관할과 행정관리, 속읍(屬邑) 순찰, 제사, 사신접대 등을 맡았으며, 중요한 직책이었기 때문에 문과 급제자가 임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지방 행정이 정비되면서 폐지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속칭에 팔령신(八鈴神)이라고 일컫는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
 경상도(慶尙道)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구비전승》
구비전승에서는 일반적으로 우탁과 연결되어 우탁이 팔령신을 퇴치한 설화로 나타난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서는 전체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 다른 2가지  종류의 팔령신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우탁선생과 팔령신 ①》
(채록자:권태방 씨, 경상북도-영덕군-창수면 가산1동)
팔령신이라고 새가 여덟 마리가 방울을 차는 건데, 영해에 폐가 많았다. 그래서 우제주(禹祭酒)(우탁은 성균좨주(成均祭酒) 벼슬을 했다.)가 영해부사로 와가주고 그 절단을 냈다. 팔령신, 신팔령을, 부적을 써가지고 팔령신을 잡아가다가, 동해 바다에 갖다가 빠뜨렸다. 한 마리가 그만 튀나가고 없어졌다. 그것은 관어대(관어대는 괴시동(槐市洞)에 속한 마을 이름. 동해바다 가까운 곳에 있음)서낭이 됐다.

그래서 그 공로를 가지고 단산서원(丹山書院, 선조 때 창건되어 우탁의 위패를 모심)에 모셔지고, 목은(牧隱, 목은 이색)하고, 가정(稼亭, 가정 이곡, 목은 이색의 아버지)도 모셔졌다.

《우탁선생과 팔령신 ②》
(채록자:박노활 씨, 채록지:경상북도-영덕군-창수면 신기1동)
팔풍정(八風亭) 유래를 물었더니, 우탁 선생이 팔령신 물리친 이야기를 했다. 팔풍정은 인량동에 있는 정자이다.

팔풍정, 그것은 모릅니까? 고려말 우탁 선생님이 그 고장에 와가지고, [청중 권해진 : 팔령신인데.] 팔령신인데, 우탁 선생이 영해부사로 왔읍니다. 그 팔령신의 폐가 어떤게 있었는가 하면, 거기서 무슨 방울 소리가 나면 그 부근에 다른 동네는 병이 난다든가, 흉년이 들고. 그런 일이 있어서 그래서 늘 거기다가 관가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우탁 선생이 와셔서, 그런 이야기 전해듣고. 그 당나무, 팔령신, 아주 고목이 있습니다. 거기 올라가서 까치집을 여덟 개를 뜯어 내려왔는데, 그 안에 그 흙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걸 이제 우탁 선생이 호로병에다 집어넣어서 동해 바다에다 빠뜨렸어요. 그런데 그 중에 한 개가 바다에서 올라갔다 내리갔다 이러니까, 그래서 이상해서 물어봤는데,

"우리가 몇 천 년 동안 이 인간의 손에 밥을 얻어먹다가, 그 선생이 와서 일제히 우리가 이제 바다아 빠져 죽게 됐다. 우리가 왔던 자취를 한 번 남길 도리 밖에 없다."

그래 관어대 들가는 입구, 괴시(槐市) 2동입니다. 입구에다가 서낭당신이 당을 하나 지었어요. 지어가지고, 그래서 해가 없어졌다 그럽니다. [조사자 : 팔풍정에 아직 고목이 있는가요?] 고목이, 고목이 넘어져있지요. [조사자 : 거기 까치집이 여덟 개 있었단 말이지요?] 에, 옛날에 있었어요. 그래서 팔풍정이라고. 정(亭)이 있어요.


《지방기록》

《영덕군군지》
현대에 만들어진 영덕군군지라는 홈페이지에 팔령신이 나오는 전설이 몇 가지 기록되어 있다.[출처]

《① 팔령신(八鈴神)과 역동(易東) 선생》
 창수면 인량리 앞 속칭 팔풍정(八風亭)에 두 그루의 큰 느티나무(槐木)가 있었다. 옛날 고려(高麗)시대에 팔령신(八鈴神)이라는 방울소리를 내는 여덟 요귀(八妖鬼)가 이 큰 나무 위에 있었는데, 형체(形體)는 보이지 않고 방울소리만 났다. 지붕 위에 방울소리가 나기만 하면 그 집은 폭패를 당했다고 하는데 당시 오서면(烏西面:현, 미곡, 오촌쪽)과 서면(西面, 碧水 현 신리쪽) 쪽에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이때 영해 부사(府使)나 사록(司錄)이 부임하면 미리 1주일 전부터 이 팔풍정 앞에서 큰 소 몇 마리를 눕히고 술을 빚고 음식을 준비한 다음 여러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부사나 사록이 정성껏 치성을 드려야 재직(在職)하는 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약 8백여년 전 문희공(文僖公)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이 영해 사록(司錄)으로 부임하자 영해부의 벼슬아치들이 앞서처럼 굿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사록(禹司錄)은 이때 치성 드림을 거절하고 사자(使者)를 시켜 두서너줄의 문자를 써 보내어 팔령신들을 제압한 후, 그 중 한 신(神)은 영양에서 울티재(泣嶺)로 넘어 오는 잡귀를 막게 하고 한 신은 인량리 팔풍정을 수호케 하고, 한 신은 동해에서 들어오는 잡귀를 막게 하기 위하여 관어대 입구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다섯 요귀는 바다에 던져 없애 버렸다. 이 후로는 팔령신의 행패로부터 벗어나 모두 무사히 생업에 종사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1명의 요귀만 살려주어 동해로 들어오는 잡귀를 관어대 입구에서 막으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나머지 일곱 요귀를 모두 수장(水葬)했다고 한다.

현재 팔풍정에는 느티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언제부터인가 이 나무를 동신목(洞神木)으로 받들고 있다.

《② 관어대 눈먼 할머니 (어대노구 : 魚臺老)》
관어대(영해면 괴시2리) 입구에 이름을 춘진(春眞)이라고 하는 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일찌기 한양(漢陽) 사람 사남(士男)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 못가 사별(死別)하고 홀로 외롭게 살았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이웃의 삯바느질이나 품팔이를 하며 끼니를 이어 갔다.
어느 해 봄날 춘진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웃집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이 어두워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뒤 춘진은 이웃의 동정도 받고 구걸도 해 가며 살아간 지 몇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해 갑자기 이(齒)가 빠지는 등 기구한 나날을 보내고 살아 가던 중 어느날 밤 꿈에 낭군인 사남이가 나타났다.
「고생이 얼마나 많았소?」
하고 사남이가 말하였다. 
「나를 데려가 주시오」
하고 춘진이 말하자 사남이는
「나를 따라 오시오」
하고 미곡(美谷)쪽을 향하여 훨훨 걸어가고 있었다. 춘진이 허겁지겁 사남의 뒤를 따라 가는데 남편인 사남이는 냇물을 건넜으나 춘진이 앞이 안 보여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소리쳤다. 이때 사남이가 뒤돌아 보면서 
「앞을 못보니 저렇게 따라오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가시 침으로 눈을 찔러 버렸다.
붉은 피가 낭자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한다. 
이 노파가 8령신 중 하나라고도 전해지며 그 자리에 고사집이 있었고 옆에 탱자나무가 있었으며 수십년 전만 해도 이곳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③ 벼락딤》
역동(易東) 선생(=우탁)이 팔령신(八鈴神)을 잡으러 팔풍정에 가니 팔령신이 미리 알고 도망치고 없었다.

다시 신리(新里)로 가던 도중 팔령신이 돌로 화하여 벼락딤 바위에 붙어 있었다. 세어보니 하나는 벌써 알고 없어지고 일곱개만 있었다. 사령을 시켜 따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날밤 동헌(東軒)에 한 할머니가 찾아와서 내가 팔령신 중 하나라고 하면서 빌고 용서를 구하므로 역동선생이 용서해 주고 관어대 입구에 당집을 지어 주었다.

일설에는 역동선생이 여덟개의 돌로 화한 팔령신을 벼락딤 바위에서 모두 잡아 상자에 넣어 군졸을 시켜 바다에 넣게 하였는데 군졸이 호기심에 바닷가에서 상자를 열어 보다가 한개를 놓쳐 버리고 일곱개만 바다에 던졌으며 이튿날 밤 꿈에 역동선생에게 한 귀신이 나타나 용서해 달라고 빌므로 관어대에 당집을 지어주고 바닷바람을 막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http://korean.visitkorea.or.kr/kor/inut/travel/content/C0313/view_1089680.jsp



《경북 어린이 도청 홈페이지》
이 홈페이지에 정리되어 실린 설화는 다음과 같다. 자뭇 그럴싸하게 재구성되어 있다.[참조]


영해면 괴시리에 팔령신 영신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고려 말 원나라의 압제를 받던 고려는 명나라가 일어남에 따라 정국(政局)은 새로이 어두워지고 국내 각처는 소란했다. 평화롭던 영해부(寧海府)에도 그 무렵부터 알 수 없는 요귀(妖鬼)의 출몰로 커다란 소란이 벌어졌다.

오서면(烏西面), 남면, 북면에서 갑자기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횡액을 당하고, 알 수 없는 일이 자꾸 생기는 것이었다.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것이 공중에서 이상한 방울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울리면 그 아래 있는 집과 사람 모두 넘어지는 것이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요사스런 방울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울리고, 울릴 적마다 희생자는 늘어나고, 영해부 중은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되었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영해부에서는 관원들을 총동원하여 수사한 결과 요귀의 출처는 府西 인량리앞에 있는 팔풍정(八楓亭)이란 두 그루의 큰 나무 위에 근거가 있음을 알았다. 이 나무는 높이가 십여장이요, 둘레가 여섯 아름 되며 평소 동민들의 휴식처였고, 길가는 나그네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요귀가 이 나무를 터전으로 하여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이상한 방울소리를 울리면 앙화와 불행이 거듭하는지라 온 부민이 두려움에 떨었고, 나무 근처에는 얼씬하지도 않으려 했다. 날이 갈수록 행패가 더욱 심하고, 피해가 거듭하니 사람들은 그 요귀를 팔풍정에서 울린다고 팔령신(八鈴神)이라 하였고, 혹시나 팔령신이 자기 집을 덮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당시 영해고을을 다스리던 사람은 영해 사록으로 와 있던 고려 말의 대유역동 우탁선생(大劉易東 禹倬先生)이었다. 역동은 도학의 대가로서 팔령신의 행패가 매우 심해짐에 따라 영해 부중이 어지러워지자 목민지관으로서의 책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직접 현장에 가서 그 원인을 규명하고, 도학의 힘으로 이를 근절코자 하였다. 도학과 요귀(妖鬼)의 대결이었다.

역동선생은 팔풍정아래에서 팔령신을 꾸짖으매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요란스런 방울소리가 울리며 공중을 선회하더니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동해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이를 추적한 역동선생은 방울소리를 향해 크게 꾸짖으며 타이르니 방울소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바다 위를 날며 맴돌더니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역동선생은 미소지으며 "그놈들 괘씸하기는 하나 불쌍하니 자취를 남겨 위로나 하여 주라" 하면서 부민들의 환호 속에 관가로 돌아갔다.

그 뒤 부민들은 바다에서 고개하나 넘어선 관어대의 한길 가에 영신각(鈴神閣)을 짓고, 역신(疫神)과 나신의 방패를 삼았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의 평온을 빌기 위하여 제사를 올린다. 입춘이면 팔령신소재백귀퇴치(八鈴神所在百鬼退治)란 글을 써서 기둥에 붙이는 행사가 지금도 전하고 있으며 영신각(鈴神閣)의 낡은 집이 그대로 있어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 영덕군지 검 토 :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박노활



《관련연구 문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희망의 문학 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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